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안녕하십니까.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정의화입니다.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한 장기적 안목을 가지기 위해
싱크탱크인 '새한국의비전'을 2016년 설립하였습니다.

새한국의 비전의 활동을 알리고자
유튜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채널을 구독/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재)
봉생병원 의료원장
새한국의비전 이사장
봉생문화재단 이사장

약력)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부산 봉생병원 원장(신경외과 전문의)
15대 ~ 19대국회의원(5선 의원)
19대 후반기 국회의장(The 19th Speaker of the National Assembly)


* 사이트
blog.naver.com/visionk2025

* 페이스북
m.facebook.com/chunguihwa

🌎인스타그램
www.instagram.com/uihwachung/?hl=ko

* 19대 국회의장 정의화 기념관
051-464-0999
부산 동구 초량상로 110
naver.me/FgteaMOE




#정의화 #새한국의비전 #전국회의장
#봉생병원 #정의화기념관 #정의화TV
#새한국의비전TV #정의화이사장
#의료원장 #정의화박사 #정의화의료원장
#민주시민교육 #세미나 #북콘서트 #토크쇼


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이번에 배재고등학교 야구부의 언행은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518 민주화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관계기관에서 내린 6개월간 출전 정지 등의 징벌적 조처가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저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학생들에 걸맞는 반성과 발전을 위한 다른 교육적 조처는 없었을까 하고 자문해봅니다.

제가 명예 광주 시민이기도 합니다만 이럴 때 우리 광주의 지식인들께서 진정한 광주 정신의 큰 품으로 이 문제에 대해 한말씀 해주신다면 크게 공감을 불러낼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저는 국민여러분과 함께 한 가지,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징계의 목적은 응징일까요 아니면 교육일까요?

학생들의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는 것과 그들의 미래까지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20년간 정치를 해온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가 법과 규정을 적용할 때, 규정 자체보다 그 규정이 사람을 어떻게 성장시키고 공동체를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를 먼저 생각했으면 합니다.

잘못에는 *분명히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책임에는 교육과 관용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광주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도시이기에, 반성하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는 것 또한 광주 정신이라고 믿습니다.

엄한 처벌보다 진심 어린 사과와 역사교육, 그리고 봉사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길이 아닐까요.

저는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응징보다 교육을, 갈등보다 화해를, 처벌보다 관용을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더많이 응징하는 나라가 아니라 더 지혜롭게 책임을 묻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품격이고 우리 국민들의 품격이 아니겠습니까?

1 week ago | [YT] | 7

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새한국의비전 ‘민주시민교육강좌’ 부산 시민 호응 속 저변 확대





부산일보 김경희 기자


정의화 전 국회의장 설립 무료 강좌
전문가 강의와 시민 토론 정책 연구
동화엔텍 김강희 명예회장 취지 공감
강좌 발전 위해 최근 1000만 원 후원







대한민국의 비전을 전문가 강좌와 시민 토론, 정책 연구를 통해 제시하는 새한국의비전(이사장 정의화) 민주시민교육강좌가 시민 호응과 후원 속에 저변을 넓히고 있다.

새한국의비전은 최근 동화엔텍 김강희 명예회장으로부터 시민 강좌의 지속적인 운영을 위한 후원금 1000만 원을 기탁 받았다고 밝혔다.

민주시민교육강좌는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이끄는 싱크탱크 ‘새한국의비전’이 주최하는 시민교육 프로그램으로, 2018년부터 매년 부산 시민을 대상으로 무료 공개강좌를 개최하며 민주주의의 가치와 시민의 권리·책임에 대한 이해를 넓혀 왔다.

그동안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저명한 강사진이 참여해왔으며, 시민들이 민주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강좌가 구성돼 있다. 민주주의와 시민의식, 사회적 책임, 외교, 법률 등 시대적 과제 등을 폭넓게 다루며, 특정 세대나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배움의 장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지난해에는 나태주 시인을 비롯해 경희대학교 김상국 교수, 아주대학교 김흥규 교수가 강연자로 참여해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강좌의 공공성과 완성도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이번 후원은 시민교육의 사회적 가치와 지역사회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민주시민교육강좌의 안정적 운영에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강희 동화엔텍 명예회장은 민주시민교육강좌 1기부터 꾸준히 관심을 갖고 강좌를 수강해 왔으며, 시민교육이 지닌 사회적 의미와 지속 필요성에 깊이 공감해 왔다. 김 명예회장은 “민주시민교육강좌는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시민 각자가 민주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번 후원을 통해 이러한 의미 있는 강좌가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새한국의비전 이사장인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대한민국의 시민의식이 나아질 때 우리의 미래도 희망적일 수 있다는 비전 아래 민주시민교육강좌를 기획해 왔다”며 “강좌의 취지에 공감하고 후원해 주신 데 깊이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성숙한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좋은 강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새한국의비전은 이번에 전달받은 후원금을 민주시민교육강좌의 안정적인 운영과 프로그램의 질적 수준 향상, 시민 참여 확대를 위한 기반 마련에 집중적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시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민교육의 장을 더욱 공고히 하고, 민주주의 가치가 일상 속에서 실천될 수 있도록 하는 교육 활동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새한국의비전은 또 올해 4월 3일과 10일, 17일 오후 6시 30분에 동구 초량동 소재 정의화기념관에서 각각 전봉근·김석환·김택환 교수를 초청해 ‘미중 경쟁 시대 한국의 신외교 및 한반도 전략’ 등 시의성 있는 주제로 민주시민교육강좌를 이어갈 예정이다. 강좌는 무료이며, 제한된 좌석 수를 고려해 전화 예약 후 참가가 가능하다. 051-462-8364.


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60113112…

5 months ago | [YT] | 17

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이순신, 하나되어 죽을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를 읽고

2022년 오월초, 430년전 5월 23일 발발한 임진왜란의 난세에 나타난 성웅 이순신에 대한 연구서적인 "이순신, 하나되어 죽을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를 읽었다.
이 책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책을 다섯 번째로 고치고 가필하여 그의 생애 마지막의 완결판으로 출간한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여기서는 저자로 칭한다)의 마지막 작품이다.
나는 그를 존경하고 존중하는 벗의 한사람으로써 저자가 74세의 나이에 이르러 이순신에 대한 마무리 역작이라고 하여 2022년 5월 첫주말 동안 읽고 훗날을 위해 요점을 정리하고자 이글을 쓰기로 하였다.

저자가 키워온 삶의 철학과 원숙한 경지의 수양으로 잘 정돈한 책이므로 그의 경지가 궁금하여 확인도 하고 싶었고 공부도 할 겸 읽게 되었다. 이 책을 다 읽고난 후 저자의 경지가 정신적 부분에서 이순신 장군의 경지에 근접해보려 평생을 노력한 것을 확인할 수 있어 너무나 기뻤다. 저자의 글 한 자 한 자를 읽으며 그가 고심하고 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작품을 가슴으로 읽어가면서 훈훈한 느낌이 가득하였다.
저자는 지난 4,50년간 이순신의 행적을 샅샅이 찾고 그에 나타나는 그의 인품이 어떠한 지를 살피고 기록하면서 네 번의 책을 출간해왔다. 이에 멈추지 않고 연구와 사색을 계속하여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필자의 인간적 성숙함이 더해가면서 인간 이순신을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유추하려는 정성에 감복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갔다.
우리 세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립정신으로 살아감을 추구해왔는데 저자는 이번의 역작에서 이순신께서 공사에 일체의 오해가 없도록 처신하면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나라의 지원이나 도움없이 창의성으로 거북선을 만들고 둔전을 경영하고 군비를 마련하는 등 자력으로 수군을 재건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간 모습을 강조하였다.
저자는 결국 이순신의 최고의 가치로 사랑과 정성, 정직과 자력, 네 가지로 정돈하였다. 이순신의 선공후사, 창의성, 솔선수범 등의 모든 행위는 이 네 가지 덕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순신의 삶의 모든 것이 이 네 가지 가치로 채워지고 있음을 저자는 오랜기간의 연구 끝에 간파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책을 읽으며 이 작품의 곳곳에 저자의 철학과 삶에대한 의문과 답이 묻어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뚜럿한 인생관을 확립하지 못한 사람은 일관된 삶을 살기가 어렵다." 책의 51페이지에 나오는 군자의 가치 열가지는 인간으로서 저자가 살면서 지키고자 노력한 가치가 아닌가 하였다. 책의 행간 곳곳에서 저자가 이 시대의 이순신처럼 살고자 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사적인 분노건 공적인 분노건 이순신의 분노에는 법도가 있었다"는 확신은 수십년간 이순신을 공부한 저자가 알아낸 높은 경지의 이순신의 정신세계가 아닐 수 없다. 이 시대 사람들의 자기 편의적 판단으로 이순신의 분노에 대한 법도를 모른채 얄팍하게 판단하려는 어리석음을 뉘우치게 하기에 족한 분석이다.
우의정 정언신의 옥사를 방문한 일에서 나의 포은조께서 행한 김득배 어른이 억울하게 효수 당한 후 왕명을 어겨가면서도 시신을 거둔 일화가 생각났다. 역사 속의 큰 인물들은 강직하고 의리를 소중히 여겼으며 항상 의를 행하려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이순신은 결코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고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고 항상 공사를 분명히 하였다. 이 점 때문에 이순신의 성공이 무너지지 않았으니 정의의 길이 곧 승리의 길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무한 경쟁시대에 살면서 경쟁적으로 물질을 탐하며 불의에 빠져들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중요한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1592년 5월 23일 왜적이 처들어 오자 부산진의 정발장군, 다대포의 첨사 윤홍신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모두 순국하였고 저자는 왜군이 파죽지세로 20 여일만에 한양에 도착할 정도의 나라 같지 않은 나라, 도망가기에 급급한 선조와 각 지역의 벼슬아치들의 모습을 통해 오늘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배가지(배운자, 가진자, 지도자)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당시의 지도자들인 벼슬아치들의 행위를 통해 이시대 모든 배가지들에게도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담담하게 적어갔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군선 103척을 바다에 가라앉히고 도망갔고 경상우수사 원균도 겁에질려 수영을 불태우고 1만여명의 수군을 해산시키면서 전선60척과 대포, 군기를 모조리 바닷속에 버리고 도망쳤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동래성이 무너지자 울산병영으로 도망가 애첩과 관물 면포1000여필을 먼저 말에 실어 보내고 도망쳤다. 경상우병사는 김성일이었다. 그는 10년전 부사로 일본에 가서 도요토미를 만난 후 왜의 침략 가능성을 부정했던 사람이라 전쟁이 나자 파직되어 고령의 병약한 조대곤이 기용되었으니 경상 우병사는 없는것과 같았다. 경상도순찰사 김수 역시 무작정 적을 피하려고하였으니 경상도는 도 전체가 텅비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조 임금의 행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질 쳤으니 임금의 자격이 없는 군왕이였다".
선조는 명색이 임금된 사람이 "내가 천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으나 조선에서 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고 명나라로 도망치려했다. 저자는 "선조는 이렇게 극단적 사대주의와 패배주의에 젖어 자주적으로 적을 맞아 싸울 생각은 하지도 못한 임금이기를 포기한 어리석은 군주였다"고 일갈하였다.
"왕은 왕대로, 장수는 장수대로, 지방수령이나 병사, 수사는 그들나름대로 일제히 도망가거나 적을 피했다.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 당한 것은 전쟁사에 없는 기록이다".
우리는 이 수치심을 영원히 가져야한다. 저자가 비겁하고 익적이었던 장수, 벼슬아치들의 이름을 일일히 거명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저자가 그런 파렴치한 인물들의 이름을 남겨 응징하고 역사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지 않기위해 이런 일의 재발을 막고자 하는 충정이 있어서라고 유추죄는 대목이다.
이렇게 임진년의 참화를 겪고도 정신 못차리고 1905년 을사늑약부터 40년간 일본에 나라를 송두리채 배앗겼다. 지금도 그 40년 간의 일제가 저지른 온갖 죄악을 들추고 밝히고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지배계급의 우리 조상들이 부족하고 미비한 잘못으로 나라를 빼앗겼으니 이를 반성하고 분발해야 하는 부분이 크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역사 속에 일어난 모든 사실들은 우리 조상들의 잘못으로 일어난 것 임이 확실한데도 이런 사실은 짐짓 회피하려고 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기 이전에 스스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역사에서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래야만 다시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40년, 6.25전쟁 같은 참극을 맞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징비록을 쓰고 이순신을 발탁하고 임진왜란 동안 조정을 지킨 서애 유성룡과 여해 이순신이 있었기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그나마 이겨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볼 때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룰 수 없는 일들 아닐까?
우리 후손들은 오늘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은 수많은 독립투사와 선각자들, 애국지사들 덕분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정치와 정치인들의 행각을 볼 때 역사에서 배울 줄 아는 민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부끄럽다.

다시 그의 책으로 돌아가서
"이순신은 결단을 내리기 전에 장수들과 의논하고 장병들과 소통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리더십을 보인 어른이다. 좌수영에서 경상도로 출전하는 문제에서도 논의의 결과 군관 송희립이 '적이 울타리 밖에 있을 때 막기가 쉽다면서 한편으로는 영남을 돕고 또 한편으로는 호남을 보호해야 하오', 토론을 충분히 한 후 먼길인 동쪽 남해바다로 나아갔다. 민주적 리더십을 통해 모든 장병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열세를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발휘한 것이다."
"임진년의 옥포승첩, 당포승첩, 한산승첩, 부산대첩의 4대승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처음의 옥포승첩은 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우리도 왜적을 무찌를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조정과 그 소식을 접한 모든 백성에게도 용기를 불어 넣어준 매우 뜻깊고 영광스러운 첫승첩이었다"
"두번째의 거북선을 앞세운 당포승첩으로 훝어졌던 관군들도 모여들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나라가 차츰 기운을 되찾고 전세를 갖춰가는 데 적지않은 희망을 불어넣어 준 소중한 승전이었다".
"거북선의 기동 타격과 두 세배의 대군을 학익진으로 대승을 거둔 한산대첩은 세계 해전사에 널리 알려진 해전이다. 왜적이 9000여명이 죽고 수십명의 왜장도 죽게 되었다. 전란에 찌든 백성들이 이순신 이름 석자에 위로받을 수 있었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각지에서 총 2만이 넘는 의병이 일어났다".
저자는 중요한 의병장들을 소개하고 있다. 곽재우, 김민. 정인홍, 권응수, 고경명, 최경희, 조헌, 김천일, 이정암, 정문부 등과 휴정, 유정과 같은 승병도 구국의 대열에 동참했다고 적시한 연유를 독자 제현들은 알 것이다. 저자가 굳이 의병장과 승병 지도자를 거명한 이유가 어려운 시기에 구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한 어른들의 존함자를 역사에 남기고자 한 큰 뜻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니겠는가?
"부산에는 500여척의 적선이 있고 상시 .6-7만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부산대첩은 이번 전쟁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은 가장 좋은 전략이라 판단하고 중과부적이었으나 출진을 결심하였다. 근 한달의 훈련을 하고 8월24일 (음력) 오후 출범했다. 결과는 조선 수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왜적선 100여척과 무수한 적병을 죽인 4대승첩 중 최대의 전과를 거둔 곳이다".
그날은 양력으로 10월 5일이고 그날을 부산 시민의 날로 지정한 것을 평소 저자는 널리 강조하고 있다. 이 저서에서는 조선시대인지라 저자는 음력으로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전쟁은 4년간 소강상태에 빠지고 명과 왜가 강화협상을 질질 끈 기간동안 저자는 이순신의 한산도 생활 등을 정리하면서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와 원균과의 갈등 등을 서술하고 있다.
"이 4년간에도 이순신은 명나라와 왜국 간의 강화협상이 안될 때를 대비하여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미래의 전쟁을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전략적으로 견내량을 굳게 지키고 있었으나 이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이순신 제거가 목적인 왜군이 심어둔 일본 첩자, 가사메의 간계에 조정이 걸려들었다. 결국 싸우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균과 조정에서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모함으로 이순신은 억울하게 구금되고 고문을 받게 된다. 원균이 통제사가 되고싶어 이순신을 모함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그가 이끈 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하여 조선 수군이 괘멸하게 되고 도망간 경상수사 배일이 원균의 패전을 미리 예측하고 12척의 전함을 가지고 달아나게 된다. 이 칠천량 전투에서 괘멸된 수군과 함께 원균도 죽게된다. 원균이 사필귀정으로 받은 천벌은 당연하나 그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나라가 호남과 충청, 서남해 재해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점령 당하게 되었다. 남은 전선은 12척이었다.
옥고를 치루면서 이순신은 고문을 받게되고 초죽음의 상태가 되어 한 번 더 고문을 당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이때 70고령의 노신 판중추부사 정탁이 상소문을 올리는데 이 상소문은 신구차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정탁은 도도한 인재론을 설파하면서 이순신의 목숨만은 건져야 하니 더이상 고문은 말아달라고 선조의 비위를 달래가면서 애절하게 상소문을 통해 호소하였다. 선조도 마지못해 결국 백의종군케 한다. 두번째 백의종군이었다".
34일만에 풀려난 것이다. 자식들을 만나고 뜻있는 많은 대신들의 위로를 받고 문안을 받았다 한다. 삼도수군 통제사가 합천 초계에 있던 권율 장군의 막하에 배치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열흘 후 평생을 극진히 효를 다해 모셨던 어머니를 잃는 슬픈 일을 당하게 된다.
"자식의 무고함을 잘아는 어머니가 옥에 갇힌 자식 수발을 위해 한양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이때 처음으로 비관적인 말을 남겼다."
"천지에 나같은 사람 또 어드메 있을꼬"

"명과 왜의 강화교섭은 3년여만에 결렬되고 1597년 봄, 드디어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거제도 칠천량 해전에서 치욕의 대참패를 당하고 이순신이 4년간 준비한 거북선과 100여척의 전함이 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전투장비는 물론 정예병 수천명도 수장되었다. 조선4도를 먹으려는 왜군을 막을 길이 없어진 것이다.
조정 대신 김명원과 이항복이 '이는 원균의 죄이니 마땅히 이순신을 기용해 통제사로 삼는 길 뿐이라고' 주장하고 선조도 이를 받아들여 통제사로 다시 기용하게된다.
이순신은 자신을 죽이려한 선조와 조정 대신들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완전히 궤멸된 상황이나 오직 국토를 지키고 백성을 구해야한다는 충의의 일념 뿐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허울뿐인 통제사였으나 이순신은 이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담담하게 통제사 재임명을 다시 받아들였을까?하고 묻는다.
저자의 답은 이렇다. "'평생을 일관해온 그의 정돈된 인격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이순신은 타고난 인품과 치열한 자기수양을 통해 지극히 *정성스럽게 살고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바르게 살며,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정돈된 인격을 이룬 사람이었다".
즉 저자는 이순신의 삶의 가치를 사랑과 정성, 정직과 자력 이 네가지로 압축하였다. 물론 그분의 사랑은 나라사랑, 백성사랑. 그리고 자애이다.

"조정은 수군을 폐지하려는 뜻으로 빈약한 전선과 패잔병들 데리고 해상을 떠돌 것이 아니라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 권율 장군과 함께 적을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천하에 회자되는 명언을 남긴다".

"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전선이야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명량이라는 영화를 통해 명량대첩은 잘 알것이다.
"12척의 배에 새로 건조한 전함 한 척을 포함해 13척으로 대승을 거둔 기적은 이순신의 울돌목이라는 특유의 해류현상을 가진 곳으로 적을 유인한 창의적이며 철저한 전략에 하늘의 도움까지 있었다. 하늘이 이순신의 위대함을 알고 측은한 나머지 도운 것일까? 명량대첩 전쟁 전날 꿈에 신인이 나타나 자세히 전략과 전술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명량대첩의 승리는 조선수군의 재건의 기회를 맞게 되었고 잃었던 남해의 재해권을 탈환하게 된 것이다. 선조는 다른 장수들은 포상으로 직급을 높여 주기도 하였으나 이순신에게는 은 스무냥 보낸 게 전부였고 포상이 없었다. 선조의 처사에 아무런 대꾸도 불평도 하지않았다. 이순신은 수도를 마친 성자와 같았고 여러장수들은 그런 그를 신으로 여겼다".
"스무한 살의 막내 아들 면이 아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고항집에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복수하러 온 왜군의 칼에 죽게되고 이순신은 한 되나 되는 코피를 흘릴 정도로 비통해 하고, 통곡을 하게된다".

"명의 대장 진린은 성품이 사나웠으나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에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고 훌륭한 장수라고 칭송을 하였으며 이순신의 요청에 명의 수군까지 휘하에 거느리게 허락하였다.
이순신은 적과 거리를 두어 수군 재건을 위해 진을 보화도로 옮겨 100여일 만에 전선은 42척으로 늘어났고 병사는 8000명으로 불어 삼도수군을 재건하게 된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전쟁을 끝내고 일본으로 되돌아 가려는 왜군을 모두 도륙하려는 강한 복수심으로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피맺힌 기도를 한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을 앞두고 갑판위에서 하늘을 우르러 만인의 가슴을 찌르는 대영웅의 피맺힌 기도를 한 것이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날인 11월19일 새벽 노량바다로 전진했다. "7년간 죄없는 조선 백성을 수없이 죽이고 능욕한 적들, 사랑하는 자식까지 무참히 죽인 적들, 그 적들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죄를 그는 기어코 처단하고 응징해야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한 모습을 저자는 이순신의 최후의 결전에 임하는 마음을 그렇게 서술하였다.
"어둠이 걷히고 검붉은 태양이 노량바다 동녘으로 떠오르는 바로 그때 어디선가 탄환이 날라와 이순신의 심장 언저리를 뚫고 지나가 죽음을 맞게된다". 그의 마지막 명령은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이었고 이것은 그의 유언이 되었다. 저자는 여기서 "비로소 평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고 기술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1598년 양력 12월 16일 이른아침에 평온한 얼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수십 년간 이순신이라는 화두를 잡고 살아온 저자는 이 순간을 "영웅은 가고 성웅이 다시오는 그 순간! 태양도 애도하고 산과 바다는 새 성웅의 탄생을 축하하며 진동했다." 고 하였는데 나에게는 저자 자신의 애도하는 마음을 표한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저자는 일부의 이순신의 자살설에 분노하면서 이순신은 한결같이 "죽게되면 죽는 것이다" 하며 삶과 죽음의 갈림에 언제나 초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아산 금성산 인근의 어라산 아래로 옮겼는데 지금의 산소이다. 묘 바로 밑에는 훗날 정조가 만든 어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 역사상 제왕이 신하의 묘소에 비문을 지은 것은 오직 이곳, 이순신의 묘소 한 군데뿐이다".

저자는 당시 조선의 적이었던 왜국, 일본의 기록으로 이순신의 위대함을 드높이고 있다. "일본의 군사 도고가 러일전쟁 승전의 축연 자리에서 자신을 영국의 넬슨과 조선의 이순신에게 비겨 칭송하는 축사를 듣고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를 넬슨에 비기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 비기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도쿠토미 이이치로의 근세 일본국민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은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나서도 이겼다.....그는 실로 조선의 영웅일 뿐아니라 동양 삼국을 통틀어 최고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엔 "노산 이은상 선생의 평가가 가장 값진 평이라고 했다. 이유는 이순신의 내면세계까지 깊이 꿰똟어 본 평이기기 때문이다. 노산선생은 이순신을 정돈된 인격자, 지도정신의 구현자로 칭송하면서 '과연 충무공은 민족으로서 대이상 구현자인 동시에 인간으로서 대인격 완성자이므로 우리는 공에게 성웅이라는 칭호를 바치고도 오히려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저자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글재주는 없으나 이순신공에게 시 한수 헌사하고 싶다면서 이 헌시로써 이순신의 일생에 대한 글쓰기를 마치고자 하였다. 저자는 배달의 불꽃, 하늘이 그를 점지해 조선을 구하라고 이땅에 보냈다가 전쟁이 끝나자 가차없이 거둬들인 까닭을 모르니 눈이 멀어지고 말문이 막히며 머리가 멍해진다고 하였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헌사한 시는 이러하다.

한산 바다 거북전선
적의 탐욕 응징했고
명량 바다 열두전선
배달 불꽃 되살렸네.

노량바다 차가울 제
하늘 두고 맹세했네.
이 원수를 다 갚으면
아무 여한 없겠다고

영웅으로 태어나서
성웅으로 돌아가니
거룩하다 님의 생애
죽었어도 살았도다!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 리더십의 원천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이순신의 삶과 지도자적 품성을 기술하였다. 394쪽에서 430쪽까지 36쪽의 짧은 글이나 대부분 국민 여러분은 이순신 장군의 역사를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실 것이므로 이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면 말미의 이 부분만이라도 필독하시기를 권하고 싶다.
평생을 이순신과 함께 한 인생을 살아온 이 책의 저자인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이 이글을 통해 그가 왜 이순신에 탐닉하고 살아온 연유와 이유를 알게 하고 있다. 그가 이순신을 통해 사랑하는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알 수 있게 잘 정돈 되어 있을 뿐아니라 성웅 이순신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6 months ago | [YT] | 8

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봉생기념병원 제3관 개관식 축사>
2026.01.07.

존경하는 내빈 여러분,
사랑하는 봉생기념병원 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는 건물 하나를 여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봉생기념병원의 다음 50년을 여는 문 앞에 함께 서 있습니다.

2026년 새해의 첫걸음과 함께 제3관을 개관하고, 시무식을 겸해 이 자리를 갖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 순간은 봉생기념병원 역사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제3관의 개관은 제 개인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 대한민국 국회의장으로 20년 정치인생을 마무리 한 후 남겨진
필생의 사업으로, 생전에 반드시 마쳐야 할 숙제였습니다.

봉생기념병원은 1970년, 김원묵 박사님께서 7층 콘크리트 건물로 착공하여 1972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경외과 전문병원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1974년, 창립자이신 김원묵 박사님께서 불의의 사고로 타계하시면서 봉생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무여섯살의 청년의사 였던 저를 중심으로 70여명의 직원들이 한마음으로 봉생신경외과 병원을 지켜냈습니다.
그 연대와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종합병원 봉생기념병원과 동래봉생병원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50년의 세월을 견뎌온 7층 건물을 퇴역시키고,
15층 규모의 제3관을 통해 봉생의 새 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제 생전에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저는 깊은 안도와 함께 하늘에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2년간의 공사 기간 동안 단 한 건의 사고나 문제 없이 준공에 이르기까지 헌신해 주신 광흥건설 김규학 대표님과 김병근 현장소장님,
가가건축 안용대 대표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이수원 팀장을 비롯한 시설관리과 여러분의 묵묵한 노고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치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제3관을 설계하면서 단순한 확장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가오는 인공지능 시대, 의료의 대변혁을 내다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구상했습니다.
동시에, 언제든 과거와 같은 코로나 팬데믹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며, 즉시 격리병동으로 전환 가능한 30개 병상을 확보함으로써
“공익을 위한 병원의 존재 가치”를 제도적으로 담아냈습니다.
또한 중증환자가 많은 우리 병원의 특성을 살려 신장내과와 심장내과, 신경외과 중환자의 치료 경과와 예후를 보다 정밀하게 예측할 수 있도록
연구 공간을 확보하고, 최신 사양의 CT와 초음파 장비를 확충했습니다.
우리는 질병을 치료하는 병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이 되고자 합니다. 기술만을 앞세운 병원이 아니라, 생명을 더 겸손하게 지키는 병원이 될 것입니다.

저는 1978년에 신경외과 전문의가 된 후,
3년간 미국에서 임상 및 연구 펠로우 과정을 마치고
1981년, 제2의 봉생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때 저는 스스로에게 한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봉생병원을 양심적인 의사들의 양산박으로 만들겠다.”
이 다짐은 지금까지도 제 마음속에서 변한 적이 없습니다.
봉생에 몸담은 모든 임상과장과 의료진이 환자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양심을 지킬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만드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단계 더 성숙한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정의화 없는 봉생’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봉생은 특정 개인의 병원이 아니라, 양심과 책임이라는 가치로 지속되어야 할 병원입니다.
이에 저는 덕망과 경험을 갖춘 봉생의 중진 스탭 여러분께서 공동으로 병원의 미래를 이끌어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원로회의 구성을 내규에 반영하였습니다.

원로회의는 명예원장과 명예이사로 구성되어
병원장과 행정원장의 든든한 자문기구로서
봉생의 정신과 방향을 지켜주는 역할을 맡게 될 것입니다.
초대 명예이사로는
제영묘, 백승언. 이상훈, 김중경. 이일선, 이원호
여섯 분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명예이사 구성은 30년 이상 재직하셨거나 명예원장, 병원장, 의무이사를 지낸 분들 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봉생 가족 여러분,
오늘 제3관의 진짜 개관 주인공은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한 분 한 분입니다.
여러분의 땀과 책임, 그리고 의료인으로서의 양심이
이 건물을 살아 숨 쉬게 할 것입니다.
봉생기념병원은 더욱 병원의 존재이유를 밝히며 시민들로 부터 평가받는 병원이 되겠습니다.

오늘 이 역사적인 출발을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제3관의 개관이 봉생기념병원의 새로운 도약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6 months ago | [YT] | 14

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주식회사 삼일방 노희찬회장의 평전같은 자서전

"노희찬의 명사만리를 읽고"


이 자서전은 작가진이 구성되어 노희찬 회장과 자제분, 지인, 친인척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노회장의 업적을 조사하여 만든 평전 형식으로 완성한 것이다.

내가 노희찬 회장을 처음 뵌 것은 2024년 12월 3일 제주도에서였다. 부산의 오지탐험가로 유명한 사라토가의 도용복 회장이 권유하여 함께 간 제주도의 어느 골프장 리조트였다. 알고 보니 1박의 제주도 여행은 대구의 노희찬 회장께서 지인들을 초청하여 마련하신 작은 음악회를 곁들인 대구와 부산의 지극히 사적인 친선 행사였다.
1943년생으로 필자보다는 5년 연상인 노희찬 회장의 첫인상은 ‘내면이 깊은 과묵한 모습’이었으며, 이웃집 아저씨처럼 수더분한 서민적 풍모가 느껴졌다. 처음 만난 자리였으나 편안하게 대해주시고 오랜 지인들과 대화하는 듯 그윽한 목소리로 대구 억양을 섞어 다정하게 응해주신 기억이 남아있다.
섬유 산업에 문외한인 필자는 노희찬 회장께서 자수성가로 섬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생을 바쳐온 섬유 도시 대구의 전설과도 같은 분이라는 것을 몰랐으나 며칠 전 대구에 다녀온 도용복 회장께서 건네주신 노희찬 회장의 자서전을 읽고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제 그 내용의 일부를 필자의 유튜브에 기록물로 남겨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독후감 형식으로 정리해보려 한다.

경상북도 영천시의 중농 집안에서 태어나 대구 공업고등학교 방직과를 졸업하고 주경야독으로 영남대학교 화공과를 마쳤다. 지혜가 담긴 사랑을 베풀며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에게 존대말을 쓰셨다는 훌륭한 어머님의 가르침이 노회장님의 인격 형성에 높은 인성을 심어주셨다고 여겨졌다. 이를테면 퇴근하고 오는 성인이 다된 아들에게 "어서 오시게". "진지는 드셨는가?"라며 6남매의 장남으로서 긍지와 책임감을 스스로 느끼게 해주신 것이다.
대구공고를 2등으로 졸업하면서 서울대 진학도 가능했고, 진학을 하지 않더라도 최고의 직장이자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가는 당시 섬유업계에서는 선망의 직장인 제일모직에 가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그러나 노희찬 회장은 제일모직 입사를 마다하고, 당시 최신 독일 기계를 도입하여 염색가공 공장을 설립하며 신입사원을 채용한다는 내외방직의 채용 공고를 보고 그 곳을 첫 직장으로 선택하게 된다.
세월이 지나 오늘의 삼일염직과 삼일방직, 삼일방의 대업을 이루게 되는 역사의 시발점은 내외방직을 선택한 탁월한 안목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평가이고 필자도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노희찬 회장의 전 생애를 통해 전개되는 사업과 세상사에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하고 있는 방향성이 뚜렷한 정신세계 때문이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할 시기의 젊은 청년의 판단에서 당장의 높은 급여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정리한 작가의 눈에 노희찬 회장은 “일이 취미이자 특기며, 건강이면서 예술”로 비치었다고 하였다. 필자가 만났을 때는 아마도 사업은 자녀들에게 맡기고 큰 대목 정도를 짚어주는 일만 하시고 사회공헌 운동과 노후를 짬짬히 즐길 줄도 아는 시절이 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자서전을 읽고 나서는 섬유가 천직이고 섬유 사업 자체가 자신인양 살아오신 일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일에 미친 사람으로 우리 세대에서도 흔치 않은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된 것에는 각 분야 마다 노희찬 회장 같은 분들이 많이 계셨기에 가능하였다는 생각이다.
필자는 오늘날의 물질주의에 너무 과도하게 젖어가는 세태를 보면서, 염려가 안되는 것은 아니나 아무리 세태가 달라졌다고 해도 앞으로도 여전히 자기 일에 미친, 그것이 취미인, 일 자체가 자신의 인생인, 그런 사람들이 각계각층에서 많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꼭 필요하다.
대구는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메카로 세계적 금융사태나 IMF 등으로 섬유업계가 치명상을 입기도 하였으나 노희찬 회장 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와촌면장을 지낸 분의 따님으로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훤한 여성과 백년가약을 맺고 1970년대 초 남의 집 문간방에 신혼살림을 차리게 된다.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한 때는 대전에 있는 풍산산업에 다닐 때였다고 한다. 휴일이면 대둔산, 속리산을 함께 다니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린 2년 7개월이었다고 한다.

노희찬 회장은 자수성가로 삶을 이룬 분이다. 스스로 노력하여 국내 최초로 특수 코팅 가공법을 개발하였다. 내외방직에서 금강수지가공 공업사로 직장을 옮긴 청년 노희찬의 관심은 오직 코팅이었다. 본인이 20%의 지분으로 주주가 될 기회를 가지면서 본격적으로 직물코팅에 올인하게 되었다. 고교 시절부터 작은 공장을 하나 해보는 것이 꿈이었으므로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르 옮겨 갔는데, 자기 지분을 가진 임원으로 일하면 미래에 꿈을 펼치는데 더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훗날 그 곳에서의 경험이 창업에 필요한 가장 많은 것을 배운 시기라고 술회하였다.

폴링에스터 가공을 해야하는데 당시 대구의 직물공장에서는 한 절(50야드)의 시가공을 위해 서울에 일주일씩 출장을 가던 시대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희찬 회장은 "그렇지, 문제는 해결하라고 존재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발상을 전환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하여 각고 끝에 "국산 제1호 로터리 워셔 가공기"가 발명되게 되었다. 이것은 대구지역 섬유업자들의 고충을 덜어주었을 뿐 아니라 비용까지 절감해주었다. 그 결과 노희찬 회장께서 근무한 회사는 큰돈을 벌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노회장은 그에 멈추지 않고 수익금으로 축소기계보다 훨씬 복잡한 설비인 고압 염색기를 만들어보자고 결심하게 된다.
노회찬 회장은 전문가들과 염색기가 있는 서울로 가서 관련 공장을 시찰 하였다. 그 시찰을 통하여 기계 제작의 기본 스펙을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고압 염색기를 제작하게 된다. 당시로는 거금인 370만원을 들여 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1967년 10월 13일 새벽 3시, 대한민국 제1호 폴리에스테르 고압빔 염색기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기계들의 발명으로 자신의 회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부를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엔지니어로서 최고의 대접을 받은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계신다.

당시 대전지역의 가장 큰 기업 중 하나인 풍한산업에서 중견 사원 공채 소식을 듣게 되어 이직하게 된다. 노희찬 회장은 직장 선택에 있어 사적인 욕구보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직장을 선택함에 있어 급여와 안정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그 수준이 에티오피아나 이집트, 루마니아 수준이고 이웃인 일본과 중국에 비해서도 월등 높은 수치인 것이 부끄럽다. 왜냐면 필자가 보기엔 직장의 선택은 돈보다는 다른 더 높은 가치에 두는 것이 삶 전체를 두고 보면 행복하고 올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1972년 10월 대구3공단 입구에 서른 살이 채 되기 전인 청년 노희찬은 150평 공장건물을 빌려 창업을 하였다고 한다. 인조모피 백코팅을 하였는데 당시 여인들에게는 친칠라 코트가 혼수감으로 인기가 있어서 시작하였다고 술회하셨다. 한 시즌 동안 실버 코팅 직물을 생산하며 자신감을 얻게 되어 다음해 봄에 염색 기계를 들여놓았다고 한다. 첫 회사의 이름은 삼일섬유가공 공업사였다.
노희찬 회장이 고교 시절부터 꿈꾸던 것은 "염색", "텐다", "코팅"의 3박자 공장이었다.창업 이듬해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였다. 다행히도 동양나일론 수출부가 효성물산으로 합병되고, 1973년 오일쇼크 직전 일본의 대형 유통기업인 다카시마야 그룹으로부터 15만 야드의 차량용 커버를 주문 받았는데 이 커버의 염색과 코팅이 노희찬 회장에게 맡겨졌다. 덕분에 오일쇼크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잘 넘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그것이 호평이 났고 노희찬 회장의 회사도 본격적인 도약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신발, 텐트, 스키복 등 각종 섬유 제품주문이 물밀듯이 들어왔다고 한다.

삼일방직이 성장을 거듭하고 있던 차에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교가 이루어지면서 1989년 4월에 중국의 섬유산업을 시찰할 기회가 주어졌다. 시찰을 다니면서 중국 관계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노희찬 회장은 "중국이 섬유산업에 관한 다양한 경험이 부족하여 최첨단 자동화 설비를 갖추어 품질에 구애 받지 않고 국제기준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려고 하는구나" 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중국은 화교 자본 등 엄청난 자본을 투입하여 한 달 간격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국에 낮은 임금으로 승부하려고 생각했던 우리 기업인들은 당황하기 시작하였고 아시아 섬유산업의 환경 생태계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자동화 및 소재 혁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삼일방직은 흔들리지 않았다. 노희찬 회장은 발은 현재에 두되 언제나 미래를 생각하였다. 면방은 노동집약 산업이라 직물생산부분은 사내 아웃소싱하고 면 중심의 섬유 소재에도 변화를 꾀해 오스트리아 소재 렌징사가 생산하는 모달(Modal, 너도밤나무에서 추출한 천연섬유)을 활용한 기능성 신소재 섬유에도 눈을 돌렸다.

연평균 3천 500만불의 수출 실적을 올리던 삼일방직은 많은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1985년 중견기업인 남선방직을 인수하게 된다. 도박 같은 모험이었으나 남선방직은 생산능력이 있는 회사이므로 매출 규모의 차이 문제는 경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남선방직, 남선직물, 보성섬유를 모두 인수하면 노희찬 회장은 방직, 직물, 가공으로 계열화하여 섬유 일관 공정을 완성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회사를 인수한 후 어려운 가운데 미래를 보고 기존의 설비를 모두 뜯어내고 최첨단 자동화 설비로 완전히 바꾸었다.
당시에는 인건비가 싼 동남아 등지로 공장 이전을 하는 업종들도 많았는데 남들처럼 갑싼 인건비 찾아 해외로 이전하지 않은 이유는 "해외로 옮긴다고 경쟁력이 저절로 생긴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0년 넘게 함께 일하고 있는 조광호 삼일염직 부사장은 "한번 믿으면 영원히 함께 간다"가 노희찬 회장의 인생철학이라고 했다. 노사분규가 없는 기업인데 그 이유는 “항상 함께 일하며 그들의 필요사항과 불만을 미리 듣고 해결해 주었고 영업이익의 20%는 노동자를 위해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남인 노현호 대표이사 부사장은 뚝 잘라 노조가 있어야 하고 회사가 발전하려면 파트너십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부친의 철학을 잇고 있다고 생각되는 대목이다.

경산시에 있는 주력업체인 삼일방직은 순수 이익을 내는 유일한 업체로 남아있다. 대구의 섬유업계라면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 암흑기에도 삼일염직은 22년간 연속 흑자를 내며 불경기 걱정없는 신화를 창조해 나갔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산에 살고 있으며 정치를 오래해 온 필자도 대구 섬유업계의 암흑기에 대해 귀동냥으로 들은 바가 있는데 노희찬 회장의 사업체는 잘 이겨냈다고 하니 전설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주변의 여러 평가 중 하나만 소개하면 "회장님은 30년 이상을 노사분규 없는 모범적인 노사화합 경영을 이끌어 냈다. 다양한 장학사업, 사회공헌과 함께 미래를 생각하는 친환경 소재개발 등으로 인해 갈은 기업인에게서도 존경을 받고 계신다"라는 것이다.

삼일방직은 특수노즐 내의 고속선회 기류에 의해 섬유 스스로 회전해 실을 꼬는 에어제트 방적 기법을 도입하여 보풀이 적게 나와 깨끗하고 안정된 원단을 제직할 수 있는 방적사 개발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를 니트, 캐주얼, 스포츠 웨어에 적용하여 2009년 기준으로 국내시장 점유율 1위(70%), 세계시장 점유율 3위(6%)를 기록하고 에코실(ECOSIL)이라는 브랜드로 세계 16개국에 상표를 등록하였다 한다. 정말 대단한 업적이다.

삼일방직의 난연 융복합 방적사 개발도 뺄 수 없는 제품이다. 랜징FR 혼방을 통해 강인하면서도 탄력성과 영구성을 갖춘 난연 융복합 방적사를 개발하였다. 그로 인해 소방복, 군복, 경찰복, 산업 안전복 등에 적용되고 현재 "네번(Nevurn)"이라는 자체 브랜드로 국내외에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항필링성이 우수한 100% 합섬 에이제트 방적사 개발을 하여 기존 폴리에스터 방적사가 가지는 필링(PILLING) 현상의 단점을 보완해 성공했다. 이로써 스포츠 웨어, 아웃웨어에 적합한 직물과 니트 원단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 제품은 포렉실(Porexil)이라는 자체 브랜드로 국내외에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2017년 3월 국내 중견 방적기업인 삼일방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미국기업을 인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년 역사를 지닌 스위스 기업 허만 뷸러(Hermann Buhler)의 미국 자회사인 "뷸러 퀄리티 얀스(Buhler Quality Yarns)"의 지분을 100% 인수하는 주식인수 계약을 체결하였던 것이다.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노희찬 회장 말씀대로 우리나라 면방직 100년 역사에 선진국인 미국에 진출한 것은 삼일방이 최초이기 때문이다. 창업 십년만에 남선방직을 인수 하였고, 방직 30년 만에 미국에 진출한 것이다.
노희찬 회장은 당시 미국이냐 베트남이냐를 두고 고심했는데 미국이 환태평양경제 동반자협정(TPP) 탈퇴와 함께 보호무역 기조를 강화하는 것을 보고 미국으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술회하셨다. 미국내 생산시설 확보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하신 것인데 최근 트럼프 2기에 들어와서 한미 FTA가 자동 폐기되고 보호무역으로 돌아서서 관세로 압박하는 오늘의 상황을 본다면 8년 앞을 내다 본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운칠기삼이란 말이 있지만 운이란 이러한 혜안을 가질 때 따라오는 것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노희찬 회장은 남선방직을 인수한 뒤 면방을 과감히 포기하는 대신 10년 동안 1억불을 투자하여 소재공장으로 변화시켰다. 노희찬 회장은 힘주어 말한다. "세상사 모든 이치가 그렇듯 환경변화에 계속해 대응하지 못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라고. 이 책을 정리한 작가가 “노희찬 회장은 자전거를 탄 아이처럼 멈추지 않고 미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호랑이의 등에 탄 것처럼 미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필자도 그렇지만 일반인들은 방직과 방적을 잘 구별하지 못할 터인데 "방적은 실을 꼬는 것이고, 방직은 꼬인 실로 직물을 만드는 것"을 일컫는다고 작가에게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2008년 3월 노희찬 회장은 한국섬유산업 연합회장을 맡게 된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실물경제가 침체될 때 였다. 탈출구로 국내외 전시회를 통해 글로벌 마켓팅 및 국제협력을 강화하기로 결정하고 '프리뷰 인 USA" 전시회와 "프리뷰 인 CHINA" 전시회," 대한민국 섬유교역전"을 개최하였다. 실패작이 될까 노심초사하였으나 뚜껑을 열고보니 비교적 호평을 받은 성공적 전시회가 되었다. 중국 바이어들의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는 데 특히 여성복의 경우 디자인과 퀄리티가 이태리, 프랑스를 능가한다는 평가까지 받았다고 한다. 참가업체들의 반응도 좋아 2011년 다음해 전시회에도 94%가 재참가의 뜻을 밝혔다고 하였다.
노희찬 회장은 2009년 타이베이에서 열린 제5차 한-대만 회의에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하여 양국의 섬유산업구조가 흡사하고 향후 대응방안이 유사하므로 양국간 경쟁구도를 초월한 상생협력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아울러 대만측도 ITMF 회의에서 한국이 대만을 지지해주어 감사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노희찬 회장은 디자인은 한계에 도달했을 지라도 신소재 개발을 끊임없이 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소재의 변화는 무궁무진하다고 자신감을 보이기도 하였다. 노희찬 회장은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수요자 맞춤형 마케팅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섬유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라고 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열거하여 설명하였다.
수요 맞춤형 마케팅 지원사업 덕분에 첫째 소비자 니즈에 부합하는 우수 소재 개발로 글로벌 경기침체 상황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점. 둘째는 중국시장에서 국산 소재의 우수한 개발능력과 신속 대응체제가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확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 셋째는 경쟁이 치열한 국내 아웃도어 시장에서 고어텍스 등 고가의 수입소재를 우수한 국산 소재로 대체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 점 등이라고 지적하였다.

노희찬 회장은 2001년에 대구 상공회의소 제17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6년간 회장을 맡으면서 내부분열을 화합시키고 말 많던 상공위원 선거를 없애고 유망한 기업인들을 상공위원으로 선정하고 3천만원씩 기부금을 받게 하여 갈등도 없애고 기금도 조성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는 데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은 모두 노희찬 회장의 인품과 그에 대한 존경 덕분이라고 생각되는 대목이다.
대구 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업적을 이루었는 데 한 두가지 더 소개한다면 먼저 우리나라 최초로 프로축구 시민구단(대구FC) 창단을 주도한 것이다. 기업인들이 1,2억씩 십시일반으로 기부금을 내어주어 성사되었다고 회고하셨다. 그것이 또 나아가 부산, 강원, 제주 등 다른지역축구단 설립에 자극제가 되어 더욱 의미가 컸다고 자랑하였다. 또한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를 대구상공회의소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성공적으로 이끌은 것을 들 수 있겠다.

대구상공회의소와 한국 섬유산업 연합회 회장, 한국섬유기술 연구소 이사장을 맡아 대구 경제발전과 한국 섬유, 패션 산업의 고부가 가치화에 크게 공헌하셨다. 나아가 대구 경북 디자인센터 건립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다고 한다. 또한 국채보상운동 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며 100년전 지역 상공인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살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9년 재단법인 삼일방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2016년 기준으로 50억원을 적립기금으로 장학금 지원사업과 교육학술 지원사업에 힘써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운동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기부문화의 나라로 변모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모범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필자는 노희찬 회장께서 건강하셔서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하면서 남은 여생동안 앤드류 카네기나, 척피니 등 세계적 기업인들이 보여준 기부 정신이 우리나라에 확산되도록 지속적으로 힘써주기를 앙망하는 바이다.

노희찬이라는 거인 기업인의 평전같은 자서전을 읽고 독후감으로 정리해보았다.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19대 국회의장 정의화가 씁니다.

6 months ago | [YT] | 4

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읽고 - 2편


저자는 7년만에 유럽으로 돌아갔다. 저자는 권하는 삶에서 필요한 한가지 암시 같은 행동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먼저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힘을 빼고 활짝 펴는 행동이다. 저자는 독자들이 손을 조금 덜 세게 쥐고 더 활짝 편 상태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면 조금 덜 통제하고 더 신뢰하길 바란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는 압박을 조금 덜 느끼고 삶을 있는 그대로 더 받아들이길 바란다. 그래야 모두에게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되니까. 우리가 목을 옥죄며 살 것인가 아니면 넓은 마음으로 인생을 포용하면셔 살것인가? 자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쳐보길 바란다."

필자의 생각에도 실제 이런 행동을 하는 습관은 많은 일들을 겪고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불안하거나 누군가와 언쟁적 상황에 빠진다거나 할 때 말이다.

미국인 스승 아디야산디의 말씀에 감명을 받고 소개한 부분이 있다.
"떠오른 생각을 무작정 믿지 말아야 한다.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현재 상황을 온전히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야 우주가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 운행된다는 근본적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진실은?

당신이 알아야 할 때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자는 이 가르침대로 살고자 애써왔고, 시간이 갈수록 그 깊이를 느낀다고 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까지 불안해하는 대신, 결국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사는데 익숙해진다면 더 높은 차원의 자유와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필자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무작정 믿음을 가져서 실패한 수많은 경험들이었다. 어떤 생각에 도취되지 말고 여러 관련되는 자료나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나 전문가의 의견을 들은 후 집행해간다면 훨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가끔 도둑 맞을 때 개도 짖지 않는다고 하듯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꽂혀 경솔하게 실수를 저지른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유념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저자는 흥미로운 얘기를 하였다. 인간을 지배하는 생각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과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생각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생각이다. 두 가지 다 멋지고 소중한 것들로 가득한 짐이란 것이다. 만약 이 두 가지 짐을 내려놓는다면 어떨까? 인생에서 좀 더 가까이 당면한 순간, 바로 이 순간을 반갑게 맞아보는 것이다.

짐은 어디 가지 않는다. 언제든 원할 때 다시 들면 된다. 인간의 인생은 이 두 가지 짐을 짊어지고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따금 벗어날 필요가 있다. 쉬고 나면 짐을 더 가볍게 들 수 있다. 생각과 통제력을 내려놓기, 내면을 돌아보고 경청하기, 정기적으로 편안하게 쉬기, 신뢰하며 살기, 이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현실에 더 깊이 뿌리내린 소중한 것들을 탐지하는 일이다. 생각의 질이 개선될 것이다.

우리 머리가 들려주는 미래에 대한 내용들은 실재의 미래가 아니다. 기억과 경험에 기반을 둔 단편적인 그림이요 스케치일 뿐이다. 우리의 기억은 한계가 크다. 확실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누구도.

필자의 경험으로도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생각을 좀 더 확실하게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면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 어떤 종류건 자신을 갉아먹는 역할을 하게 되고 현재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보다 나은 현재를 위해서 과거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단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추억 외에는 잊어버리는 편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저자가 말하듯 결정할 변수는 너무나 많기 때문에 어떤 목표와 원칙만 세우고 미래를 짐 같이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려놓는 것이 현재에 더 충실할 수 있고 그러면 보다 나은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저자는 스위스의 칸더슈테크 사원으로 옮겨 갔으며 그곳에서 승려 생활을 하던 중 어느날 내면에서 "앞으로 나아갈 때가 됐어"하는 영감을 갖게 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스스로 놀랐다. 승복 차림으로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에게는 놀라운 생각이었다. 그 후 6개월 정도 고민하다가 결국 결정을 내리고 어머니에게 전화하였다.

2008년 11월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1992년 1월, 태국 숲속의 사원을 찾은 후 16년만에 승복을 벗게 된 것이다. 왜 승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는지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앞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는 내면의 소리를 실천에 옮긴 듯하다. 그러나 부모님 곁으로 돌아온 후 그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우울증에 빠졌고 고질적인 병도 악화되었다. 그는 자살까지도 생각했으나 마음을 수행한 승려로서 기어이 이겨낼 수 있었다.

인간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힘들 때는 더욱더 그러하다. 될 수 있으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야 한댜. 안전하고 편안한 관계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 이 책을 쓰면서 그가 한 말이다.
고향에 돌아온 후 그는 몇 달간 사람들과 대화 없이 고립되어 지냈다
"영적 성장을 위해 17년 동안 공을 들였는데, 겨우 이 모양 이 꼴이구먼"하고 자책하기도 하였다. 긴 시간을 보낸 만큼 시간을 초월한 지혜의 빛을 가슴에 품고서 돌아왔어야 했는데 실상은 스웨덴에서 가장 불행하고 실패한 사람으로 전락한 것 같은 생각도 하였다.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그가 아는 한 가장 가혹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영적 스승이었다.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믿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가 그때보다 더 굳건한 적이 없었다. 안팎의 온갖 어둠 속에서도 그는 명상을 통해 쉴 곳을, 호흡할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결국 저자는 18개월 만에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다.

18개월이 지난 시점에 그가 승려로서 마지막을 보냈던 스위스의 사원을 방문 했을 때 아잔 케마시리 스님은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티코, 이젠 자네가 가진 걸 다시 나눠줄 때가 됐네". 그는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명상 수련회, 강연 등으로 명상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자신의 소중한 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에 깊은 의미를 갖게 되고 자신의 마음이 머물 곳을 찾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화를 줄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이 그렇게 망가진 채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던 것에 감격하였다. 방송에도 출연하게 되고 그 방송 덕분에 엘리사베트라는 20년전 디너 파티에서 한 번 만난 적 있는 친구의 친구가 연락을 해와 만나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저자는 부처님께서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꼽았다고 한다. 첫번째는 자애이고 두번째는 연민, 세번째는 희열이다. 남의 성공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말한다. 공감적 기쁨이다. 네번째는 평온이다.
이 마음가짐들은 우리 마음속의 아름다운 안식처들을 어떻게 기르고 넓힐 수 있을 지 부처님은 그 방법을 말씀하셨다. "항상 너 자신부터 시작해야 하느니라" 자신에게 먼저 연민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자신과 맺는 관계야말로 진정으로 평생 이어진다. 자신과의 관계가 연민과 온정으로 이루어지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살펴 준다면 세상 전체가 반드시 좀 더 좋은 곳이 될 것이고 우리안의 고귀한 마음가짐이 흘러넘칠 것이다.

저자는 늘 바르고 진실하게 아는 것이,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어왔다. 그러던 어느날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라는 소위 루게릭 병에 걸렸으나 승려 시절 배웠던 것들이 여러모로 도움이 되어 투병 생활을 잘 이겨내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을 힘들어 하였다. 덮쳐오는 절망감을 물리치자, 마음 속에 싹트는 다른 느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죽는 그날까지 진정으로 살아있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저자는 2년여 동안 루게릭 병 투병 중에도 우리에게 권고한다. "삶속에서 결정을 내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고민할 때에도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늘 명심하길" 바란다고. 선의로 행동하고, 조금 더 공정하고 친절하게 행동하고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소중한 일이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기르는 데 필요한 것은 자신의 변화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아름답고 강한 힘을 겉으로 드러내면서 살아가자고 말하고 싶다. 지금 이 세상에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죽음의 질병과 사투하는 중에 저자의 권고이다. 음미해보길 바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악연도 있고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불량한 사람들의 행위로 인해 막대한 금전적 손해를 보거나 마음이 쓰린 일을 가끔 겪기도 한다. 저자는 세상에는 이해의 수준을 넘어선 악이 존재하나 이것과 별개로 평범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악질적이고 양심없는 행위들이 있다. 비난과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그 행위를 저지른 사람에게까지 완전히 마음을 닫아서는 안된다. 사람과 행위를 분리할 줄 아는 것을 권하고 있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따뜻하게 포용하고자 하는 마음 상태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저자는 사람과 행위는 얼마든치 분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화해와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분노와 미움이 자신에게 끼치는 영향을 뒤돌아 보면 느낌이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어서 "수용의 태도가 우리의 마음에 어떤 감정을 머물게 할 것인지, 그리하여 우리의 정신을 어떻게 건강하고 온전하게 지킬 것인지를 결정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피할 수는 없으나 그런 감정이 곧 우리 자신이라고 믿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내면을 전부 차지하고 물들이게 두지 말길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면 분노나 억울함도 시기와 미움도 더는 우리를 해치지 못하고 곧 후회할 일을 저지르게 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람과 행위를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과 행위가 동일시 되는 경향이 있다.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이 쉽지 않으나 그렇게 노력해가는 것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고 필자도 동의한다.

죽음의 순간이 얼마 남지않은 시점에서 저자는 죽음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죽음에 저항하고 이겨내야 할 모욕이나 실패로 그리는 데 의문을 표하고 죽음을 삶의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탄생의 반대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숨을 거둘 날이 오면 그날이 언제든, 싸우라고 말하지 말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게 도와주길 바랐다. 그리고 감사해야할 것들을 다 기억하고 숨을 거둘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면서 끝으로 그는 사랑하는 아내 엘리사베트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기를 소원하였다. 이 문장이 필자에게도 아련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인가. 최고로 좋은 죽음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 아닌가.

그는 1월 17일 한낮,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조용히, 평화롭게 잠들었다.

저자는 이 책의 말미를 이렇게 장식하였다.

"이제 저는 축복받은 자의 기쁨을 느끼며 어떤 예측도 불허하는 모험을 떠납니다. 걱정도, 의심도 더이상 없습니다. 당신의 존재가 햇볕처럼 따뜻했습니다. 온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6 months ago (edited) | [YT] | 5

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읽고 - 1편


‘숲속의 현자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이라는 부제가 딸린 스웨덴의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가 지은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읽었다. 서울에 일정이 있어 갔다가 마침 자투리 시간이 있어 교보 문고에 클래식 CD를 사려고 들렸다가 책 제목에 눈이 가서 샀다.

비욘은 전도가 양양하고 유능한 젊은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스톡홀름 경제대학에 입학하였고 대학을 졸업한 후 23세였던 1985년 봄에 학위를 받았다. 이후 거대 다국적 기업의 에스파냐 지사에 근무하였고 26세 때 스웨덴 최대 가스업체였던 AGA 자회사의 최연소 재무담당 최고 책임자가 될 예정이었다.

어느 날 그는 성공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전력을 다하는 하루하루에 대한 회의가 들게 된다. 즉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재무담당자의 주요 일인데 내가 왜 그 사람들의 재산을 최대한으로 늘리는데 전력을 기울여야하나? 하는 회의를 품게 된다.

그는 <선(Zen)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라는 책을 읽게 되고 "인간 내면의 평화로운 것, 고요하고 차분한 것, 자꾸 떠오르는 갖가지 생각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지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소중하며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와 같은 것들에는 보상이 따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을 몇번 읽다가 깨달음을 얻게 되고 이는 ‘자신의 생각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하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그는 명상을 배우게 된 뒤 명상을 통해 어떤 생각이 충동에 가깝게 자신의 내면에서 불쑥 떠올랐다고 한다. "앞으로 나아갈 때가 됐어"

소위 잘 나가던 젊은이가 직장을 그만두고 다 내려놓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의 현명한 소리를 듣고 싶어했으며 "우리는 누구나 생각을 내려놓을 능력이 있다. 다만 약간의 연습이 필요할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일 년간 문학을 공부한 뒤 더 넓은 세상을 탐색해보기로 했다.
인도로 건너가 유엔의 세계식량계획을 집행하는 재무관리자로 일하게 된다. 그 일 년 동안 히말라야 등으로 배낭여행을 하였고, 카트만두에서 매력적인 남아공 출신의 헤일리라는 의대생을 만났다. 둘은 2주여간 꿈같은 시간을 보냈으나 끝내 그는 여학생에게서 차이게 되고 태국의 한 해변에 버려져 외롭고 비참해지게 된다. 첫사랑에 실연을 당한 젊은이로서 자신을 삼킬듯 차오르는 어두운 감정을 다스릴 방법을 못 찾아 정신적 방황을 하였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온 마음으로 첫사랑을 겪고 그것이 실연으로 끝났을 때 누구나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이겨내는 방법은 각자가 다를 것이지만... 그때 저자는 마음의 고통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누군가의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게 부처님이라면 괜찮은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침 그때 태국 북부의 한 사원에서 한 달짜리 명상 과정이 있음을 알게 되고 실연한 저자는 그 사원을 찾게 된다.

그는 명상 과정을 통해 세 가지 선물을 얻게 된다. 첫번째 선물은 자신의 의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아무 의심없이 믿지는 않게 된 것이다. 두번째 선물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힘든 시절조차 영원히 지속되진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세번째 선물은 명상을 계속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여는 열쇠를 받아든 것 같았다. 여기저기 흩어진 관심을 거둬들이고 선택한 곳으로 주의를 쏠리게 하는 것. 진정한 고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지 말라" 저자는 살면서 이보다 더 도움이 됐던 말은 별로 없다고 하였다. 떠오르는 생각을 거르지 못하고 다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가 되어 수시로 상처받는다. 떠오르는 생각을 막을 수는 없지만 믿을지 말지는 선택할 수 있다.

필자도 처음 떠오른 생각에 매몰되어 실수를 저지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따라서 떠오르는 것을 모두 믿지 말라는 것이 가슴에 와닿았다. 누구나 이 말을 기억해두면 실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불교 관련 서적을 많이 읽었는데 그중 하나가 <길을 바라보기, seeing the Way>였다. 책 속에 태국 동북부의 한 사원이 등장하는데 세계 각국에서 온 숲속의 승려들이 함께 지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도 태국에 가서 숲속 승려가 될까?"하는 생각이 그의 내면에 작은 하나의 씨앗으로 뿌려지게 된다.

결심한 그는 어머니에게 숲속의 승려가 되겠다고 말하게 된다. 그리고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1992년 겨울 어느날 스웨덴을 떠났다. 내면의 직관에 의지해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런 결정이 주는 고요하고도 단단한 확신이 느껴졌고 그의 인생은 그렇게 완전히 다른 길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2년 1월 28일 숲속의 사원에 들어서게 된다. 몇 주 뒤 행자가 되고 3개월이 지난 후 수습 승려가 되면서 승명도 받게 되었다. 사원의 주지이자 스승인 아잔 파사노 스님이 나티코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지혜롭게 성장하는 자"라는 뜻이다. "무소유"의 삶을 위한 이름이다. 렇게 사미승으로 1년을 보낸 뒤 수행의 길을 걷기에 적합하다고 판단되어 정식 승려가 되었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는 좌선에 적응하는 데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후회한 적은 없고 수행을 시작하고 나서야 마침내 항상 그의 내면에서 "이건 내 삶이 아니야"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고 고백하였다.


난생처음 세상과 생각이 일치했다. 현재 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기, 진실을 말하기, 서로 돕기, 쉼 없이 떠오르는 생각보다 침묵을 신뢰하기, 마침내 집에 돌아온 것 같았다고 술회하였다.

저자는 담담히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때때로 내면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문득 주위가 분명해진다. 마음의 소리, 직관이라 말하기도 하나 저자는 순간의 지성이라고 불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지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능력이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못 듣고 있다. 외부에서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는 시대라 더욱 그런 것 같다. 우리 정신을 쉬게하고 내부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기가 그 어느 때보다 어렵지만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행복은 외부에서 온다고 믿는 사람은 달콤한 디저트만 찾아 먹는 것과 같다. 디저트는 생명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자양분을 제공하지 못하지 않은가? 저자의 말이다. 진정한 행복은 내면에서 온다고 믿는 필자도 저자의 이 말에 공감한다.
숲속의 승려가 된 저자는 "일상생활에서도 틈을 내어 멈추고 고요를 느껴 보아라 정적의 순간을 찾는 것이다. 자신의 속에 내재한 소중한 능력을 돌보고 키워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항상 현실과 투쟁하는 식의 막장드라마 같은 삶이 될 수 있다."

저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하였다고 소개한다.
"이성적인 마음은 하인이다. 반면에 직관적인 마음은 신성한 선물이다. 우리가 창조한 사회는 하인을 섬기느라 선물을 잊어버렸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정교하게 연마된 "지혜"라는 나침반이 있다. 그러나 그 지혜의 소리는 은은해서 일부러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

저자는 내려놓기의 지혜가 참으로 심오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라고 한다. 우리를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하고 외로움과 두려움을 부르는 생각을 내려놓는 순간 힘을 잃는다. 물론 실천은 어려우나 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생각이 결국엔 우리에게 가장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들여다 보아야 한다. 필자도 이 부분을 읽으며 살아오면서 꼭 짚어서 말하긴 어려우나 내려놓기 어려운 생각들로 많은 불이익을 본 경우가 많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사되는 아잔 자야사로 스님의 가르침을 소개했는데 그것은,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저자는 강조한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주문을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뇌인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아침 풀밭에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한 진실이나 우리는 쉽게 잊어버린다. 이 지혜는 시대를 초월하며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틀릴 수 있어, 내가 다 알지는 못해"라는 생각에 익숙해지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확실하게 행복해질 방법은 흔치 않다고 말한다.
이 말은 명쾌하다. 필자도 살아가면서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소중하게 간직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부처님의 위대한 발견 중에 하나는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 대부분은 자발적인 것이며 스스로 초래한 고통이다. 우리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생각을 굳게 믿는 수가 있다. 존재하기 버겁고, 어렵고, 복잡하게 하는 그런 생각에서 말이다. 고통은 내 안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심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아주 겸손해야 한다. 남을 탓하고 원망해서는 해결할 수 없다."

6 months ago (edited) | [YT] | 1

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2025.09.12.
동서대-세토포럼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심포지엄 기조연설문

의(義)로써 화(和)를 이루어가자



– 신의를 바탕으로 한 실용의 미래 한일관계 –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그리고 한일 양국의 미래를 염려하고 애정을 가진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한일수교 60주년을 맞이하여 제가 신뢰와 실용의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 “의로써 화를 이루어 가자”는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 8월 23일 이재명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여 김대중 오부치 공동성명 이후 27년 만에 한일 정상의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은 한일 간의 미래를 밝혀주는 서광이었으며 수교 60주년의 의미를 드높인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일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어가기로 선언하고 AI 협력, 무역과 경제의 상생, 저출산 고령화의 인구문제' 등 함께 미래를 열어가기로 한 것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될 것입니다.

특히 저로서는 2016년 3월 국회의장으로 재임시절 오오시마 일본 중의원 의장과 함께 만들었던 "한일 미래대화"의 설립취지와 같은 것이라 기쁨과 함께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어질 대사님들의 라운드테이블과 양국 전문가·기업인들의 토론을 통해 두 나라가 나아갈 구체적인 청사진이 드러나기를 기대합니다.”


1. 2025년, 한일수교 60주년의 의미


지난해 말부터 한국이 겪어온 국내 정치 상황과는 별개로, 2025년은 외교적으로도 참으로 복잡다단한 시점입니다.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더불어 국제적 불확실성은 어느 때보다 증대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정부의 지나친 자국 중심주의 노선으로 인해 전통적인 동맹 관계와 국제질서의 규범까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국, 일본뿐 아니라 EU를 비롯한 국제관계의 주요 행위자들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금년은 한국 외교에도 중요한 시기입니다. 11월이면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립니다. 21개 회원국 정상급 지도자들이 한국에 집결해 역내 비전과 발전전략, 현존하는 위기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참석 의지를 보여 보다 성공적 회의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나라는 의장국으로서 역내의 평화유지와 공동 발전을 위한 주요국 간 합의를 이끌어야 하는 중대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특히,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기도 합니다. 한국과 일본은 인도·호주와 함께 아태지역 번영과 평화의 핵심축입니다. 이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도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미국이 지속적으로 한일관계 개선과 한·미·일 삼각 안보체제의 굳건한 유지를 강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미국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한국은 이번의 이재명 대통령의 노력처럼 우리의 안보와 성장을 위해 한일관계 뿐 아니라 한·미·일 관계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한국으로서는 한·중·일 관계의 발전에도 소홀할 수 없습니다.

2025년은 세계역사의 격변기입니다. 우리의 대응에 따라 지정학적 위기가 증폭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은 양국이 함께 격동기를 이겨낼 핵심적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2. 가슴에 묻은 과거, 그러나 함께하는 미래


저는 어머님의 4형제가 모두 재일교포로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그 시절, 한국인에 대한 차별은 심각하게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한국인의 자긍심을 지키며 당당히 살아온 그분들의 삶은 제 청년 시절에 깊은 감동과 울림을 주었습니다. 식민 통치의 아픔, 독도 영유권 도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의 억울한 고통 앞에서 저 역시 ‘반일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사 앞에 정직하고 냉철하게 마주서면 그 책임의 한 축은 사색당파와 쇄국정치에 갇혀 위정척사로 근대문명을 수용하지 못한 우리 스스로에게도 있었음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급변하고 있는 국제적 현실 속에서 우리가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면 스스로를 불행한 역사 속에 가두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우리가 국제사회의 선도국가로 일어나기 위해서라도 과거를 넘어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옮겨야 할 것입니다.

2차대전 후 독일과 프랑스, 폴란드 등 유럽각국의 용서와 화해에서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복수’란 말은 정치외교적 언어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에게는 일본에 대한 막연한 복수심리가 마음속에 깔려있습니다. 국가대항 스포츠 경기에서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일전만큼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수교 60년, 이제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진정한 신의를 만들어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부터 한 가지 철학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일본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일본을 능가함으로써 일본에게 아름다운 복수를 해야 한다." 이것은 증오가 아니라 존중과 실력을 통한 미래형 경쟁의 선언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저변의 복수심리가 아름다운 경쟁으로 승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일본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인권존중의 기본적 가치를 함께 하는 국가인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고, 넘을 것은 넘고, 극복할 것은 극복하자.” 이 정신이 한일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글로벌 시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정치외교적, 경제적으로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서도 윈윈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입니다.

일본 정부도 퇴행적인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자세는 일관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1990년대 이후의 한일 간 합의를 보면 분명한 흐름이 있었습니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의 고노 담화,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사과한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가 대표적입니다. 특히,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의 공동선언은 정점을 찍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과 과가 있는 지도자였지만,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통해 일본 측의 사과와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발전 방향을 제시한 점은 커다란 업적입니다. 그런데 2011년 12월 한일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부터 한일관계는 위기에 봉착하였고 독도문제를 크게 부각하는 등 일본의 태도가 급변했고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천황의 사죄를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양국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일로를 걸었습니다.


제가 국회의장 정상외교 일환으로 방일한 2014년 시월 26일 당시의 한일관계는 한마디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최고조로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아베의 역사 수정적인 행보, 강성 안보정책으로의 전환에 대해 박근혜 정부는 강 대 강으로 맞서면서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절대 한일관계 개선 및 정상회담 개최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던 시기입니다. 2014년 8월에 부임했던 유흥수 주일대사도 부임한지 2개월이 지나 저와 아베 총리와의 면담시간 직전에야 처음 만났다고 할 정도 였습니다. 저는 경색된 한일관계의 실마리를 의장외교를 통해 실마리를 풀어보자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부끼 분메이 중의원 의장 초청으로 방일하였고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던 양국 관계의 개선과 의장 레벨의 대화 채널 설치, 그리고 조속한 정상회담 개최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부끼 중의원 의장과의 일화를 처음으로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저와 이부끼 의장은 중의원의장 공관 2층의 내실에서 비서실장과 통역만 대동한 단독면담 자리를 가졌습니다. 이부끼 의장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기로 하였으니 허심탄회하게 말씀 드리겠다고 하면서 통역시간 포함하여 약 20분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현안에 대한 일본의 견해를 말씀하였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말씀의 말미에 "베트남전쟁 중 한국군의 만행을 지적하면서 전쟁 때는 항상 일어나는 문제"로 치부하였습니다. 특히 그 부분이 저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하고 싶은 말씀은 너무나 많습니다만 제가 방문한 것은 언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양국 관계를 복원하고 발전적 미래를 위한 것이므로 모두 참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개입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란 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1층으로 내려가 모리 전 수상을 위시한 여러 중진 의원들과 의견 교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3. 이제는 ‘의(義)’로 ‘화(和)’를 이루어야 할 때


저는 국회의원 20년 동안 한일관계의 발전을 위해 나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조선통신사 의원연맹을 결성하고 회장을 맡아 양국 의회 간 신뢰 형성에 앞장섰고, 한일양국이 수년간 위기에 봉착했슴에도 아무 역할을 못하는 한일의원 연맹을 보면서 국회의장 재임 때 의장 레벨에서의 새로운 교류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여 오오시마 후임 중의원 의장의 동의로 "한일 미래대화"라는 회의체를 창설했습니다.

이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함께 대비해가자는 뜻에서 양국 국회의장 중심의 진정성 있는 미래대화의 틀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2016년 3월 1차 미래대화 회의를 일본 중의원 회의실에서 개최한 후 매 2년마다 이어졌으나 문희상 국회의장의 블럼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실언한 것이 문제되어 중단된 것을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27일 아베 총리를 만났습니다. 이때 저는 일본이 화를 중시하는 화국이고 정치적으로 한일관계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아 왔기 때문에 "일본 국내의 화(和)도 중요하나 한일양국 간의 화(和)도 양국의 미래를 위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때 아베 총리가 제게 했던 말은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후 아베 총리가 보여준 것은 완전히 다른 길이었습니다.

이제는 한일관계가 과거에 머물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화해는 단순한 타협이나 형식적 협력이 아니라, [‘의(義)’에 기초한 화(和)]여야 합니다. 동양의 고전 《주역》에는 “의로써 화를 이루면 이롭지 않음이 없다(以義制和則無往不利)”는 말이 있습니다. 정의와 신뢰가 없는 화해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제가 고인(故人)이 된 아베 총리에게 당시 들려주었던 말의 진의가 이것이었습니다. 진정한 미래지향은, 불편한 진실도 외면하지 않는 용기와 신의를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합니다. 일본은 한일간의 과거사에 걸린 문제들에서 이 점을 명심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은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를 위해 신의를 굳건히 해가며 조화로운 한일관계를 맺어 가도록 노력해 가야 합니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서 제 개인적 소회를 한 가지 말씀드린다면 박근혜 정부가 각고의 노력으로 만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가 정권이 바뀜으로서 지켜지지 않았던 일은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란 점이었습니다. 이번의 한일공동성명으로 실현되어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우선, 서로의 현재 모습을 호혜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일본은 과거사를 반성하는 가운데 한국의 위상을 평가하고, 한국은 전후 일본의 재건과 평화추구 노력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서로의 경제적 성취와 민주적 안정을 인정하는 가운데 동아시아에서의 한·일 협력의 필요성에 다시 한 번 공감해야 합니다.

양국간 협력은 한반도 주변 평화를 수호하고 격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국익을 확보하는 기초적 조건입니다. 매년 1천만 명의 한국 국민이 일본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소중한 자산임을 잊지 말고, 정치·외교·경제·산업·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관계를 발전시켜 가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말씀드린 [‘의(義)’에 기초한 화(和)]를 실천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4. 결어


저는 한일관계가 감정에서 머무르지 않고, 책임과 품격,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번 한일양국의 공동성명을 계기로 더욱 발전하도록 양국의 지도자들은 더 침착하고 현명해야 합니다.
‘의’(義)는 과거를 부정하지 않되,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여는 힘 '입니다.
우리가 ‘의(義)로써 화(和)’를 이루어 한일양국은 경쟁을 넘은 협력의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9 months ago (edited) | [YT] | 15

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너무나 슬픕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강남주 총장님을 떠나보내려니 가슴이 먹먹하고 저려옵니다.

오면 가야하고 만나면 헤어져야 하는 생노병사의 인생 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유독 강남주 총장님이 홀연히 떠나시니 그저 슬플 따름입니다.

어릴때 수정동 이웃집 어른이셨고, 1989년 제1회 봉생문화상을 수상하신 후 인연이 깊어져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제겐 삼촌같은 분이셨고 제 삶의 향도의 한분이셨으며 천금같은 부산문화계의 거목이셨습니다.

부산 문화계의 큰 지도자로써 문화의 불모지 부산을 오늘의 문화도시 부산으로 만드는데 쌓으신 공로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것입니다.

강남주 총장님은 역사문화유산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강남주 총장님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한일 조선통신사 역사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한국측을 대표하여 혁혁한 공로를 세우셨습니다. 한일 조선통신사 사업에 심혈을 기우리신 노력은 한일간의 우호를 증진시키고 용서와 화해를 통한 한일관계 복원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제 강남주 총장님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할 시간이되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만나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강남주 총장님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부디 영면하시옵소서

옷깃을 여미며 삼가 정의화 올립니다.

1 year ago | [YT] | 11

정의화의새한국의비전TV

동래봉생병원이 개원 35주년을 맞았습니다. 1990년 6월 뇌척추신경, 심혈관, 소화기 중점 병원으로 시작해 현재 19개 진료과, 42명 전문의, 500여명 직원, 4개 의료관, 300병상급 종합병원으로 성장한 동래봉생병원에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1 year ago (edited) | [YT] | 19